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데시 전투 (문단 편집) == 결과 == 카데시 전투의 결과 이집트군은 본국으로 철수했다. 히타이트군은 그대로 군사작전을 계속하여 이집트의 중요한 거점인 우피(현재의 [[다마스쿠스]] 주변)를 점령했다. 또한 이집트의 동맹국인 아무루를 공격해서 약탈했다. 아무루는 이때는 히타이트에 항복하지 않고 버텨낸 것으로 보이지만, 전투가 벌어진 지 1년 이내로 도로 히타이트의 동맹국이 된 것은 확실하다. 이로써 [[아시아]]([[중동]])에서의 이집트의 영역은 [[가나안]] 지역만으로 축소되었다. ||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attachment/kadeshpeacetreaty.jpg|width=100%]]}}} || 그 후에도 이집트와 히타이트 사이에 분쟁이 이어졌는지는 확실하지 않다. 후에 평화조약이 맺어진 것을 보면 그랬을 수도 있다. 단, 흔히 알려져 있는 대로 이 전투의 직접적인 결과로 평화조약이 맺어진 것은 아니다. 이집트와 히타이트 사이의 공식적인 평화조약이 체결된 것은 전투에서 [[무려]] 16년이 지난 기원전 1258년의 일이며, 이때도 이집트의 왕은 여전히 람세스 2세였지만 히타이트의 왕은 새로 즉위한 하투실리 3세였다. 여하간, 카데시 전투 이후에 맺어진 평화조약은 기록상으로 남아 있는 인류 최초의 평화조약이라고 한다.[* 전쟁에서의 승리나 패배로 한 쪽이 다른 쪽에 복종하는 조약이 아닌 대등한 두 세력의 공존을 명시한 평화조약으로서 최초라는 뜻이다.] 히타이트의 수도 하투샤에서 당시 맺어진 조약의 내용이 담긴 설형문자 점토판이 발견되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. 이 조약문 원본은 하투샤 지역이 있는 [[터키]]의 [[이스탄불]]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가 되어있으며, 복사본은 국가 간 평화공존의 상징으로 [[국제연합]] 본부에 걸려있다. [[아부심벨 대신전]]의 기둥의 방을 감싸고 있는 벽에 카데시 전투의 장면들이 그려져 있다. 카데시 전투의 의의는 이집트의 북방 한계선, 히타이트의 남방 한계선이 정해진 싸움이었다.[* 출처: 뉴스멘터리 전쟁과 사람, YTN 곽민수, 한국 이집트학연구소장 영국 더럼대 박사 수료.] 히타이트가 더 유리한 결과로 전투가 종결됐지만 이집트 또한 오늘날 남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패권을 확보하는데 성공했고 히타이트 또한 이집트의 입장을 존중하며 마무리 했다. 하지만 동시에 카데시 전투는 히타이트와 이집트 신왕국이란 두 강대국의 한계점이 정해진 사건이기도 했다. 이집트와 히타이트는 카데시에서 모두 가용할 수 있는 최대병력을 투입했음에도 이렇다 할 이득을 얻지 못했고 이후 양국은 여러 사건의 영향들도 있지만 쇠퇴하기 시작한다. 결국 히타이트는 전쟁 직후 내분에 시달리다 [[암흑시대]]에 갑자기 멸망해버렸고, 이집트는 [[바다민족]]의 침략을 막고 미케네 문명이나 히타이트와 달리 암흑시대에도 생존했지만 모든 국력을 소모하여 제3 중간기라는 긴 혼란기를 거치고 [[아시리아]]의 속국으로 전락하게 된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